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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일기 3화: 일본어 벼락치기

메구로주민2018.12.02 01:10조회 50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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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언가를 그렇게 절박하게 배워본 적이 있나 싶다. 회사에는 외국인이 한 명도 없다고 했으니, 일본어 공부는 이제 생계가 걸린 문제였다. 현지에서 입사 전 준비를 하려면 현실적으로 남은 시간은 50일 정도. 극도의 몰입을 통해 미친 듯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까막눈 외노자로 출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 수업을 들었고, 군대에서도 '한자와 나오키', '진격의 거인' 등 일본 작품을 즐겨 본 덕에에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기초적인 회화 정도는 건너뛰고 시작할 수 있었다.

 

곧바로 학원을 알아본 뒤 신촌 파고다에 일본어 수업을 동시에 3개를 등록하고 하루에 여섯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한국의 일본어 교육은 대체로 공통과정으로써 기초 문법을 떼고, 이후 JLPT 자격증을 준비하는 시험대비반과 취미로써의 일본어에 가까운 회화반으로 나눠진다. 나는 아무래도 입을 트이게 해야 할 것 같아서 회화 위주의 수업을 들었다. 일상에서도 스스로를 일본어에 노출시키기 위해 핸드폰 언어설정을 일본어로 바꾸고, 매일 일본 라디오를 듣고, 한국에 있는 일본인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이 세 방법은 꽤나 효과가 좋았는데, 먼저 핸드폰은 일본어를 지원하는 앱들까지도 전부 일본어로 바뀌면서 은근히 공부가 되었고, 라디오는 영상으로 내용 유추가 가능한 TV와 달리 못 들으면 거기서 끝이기 때문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본인 친구들로부터는 학원에서 배우기 힘든 '반말'을 배울 수 있었다.

 

캡처.JPG

당시 청취했던 일본 라디오 Radiko. 이동 중에 앱으로 들으면 좋다.
한국에서 들으려면 설치방법이 다소 복잡하나 조금만 검색해보면 쉽게 이용 가능하다.

 

일본어가 우리말과 비슷하다는 건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와 이게 다 똑같네'라고 느낀 것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내다'와 '딛다'의 합성동사인 '내딛다'는 일본어에서도 踏む([후므] 밟다, 딛다) + 出す([다스] 내다)의 조합으로 踏み出す([후미다스] 내딛다)가 된다. 서로 대응이 안 되는 케이스도 수두룩하지만, '퍼올리다', '갈아타다' 등 상당수가 일치하며 차이점은 일본어는 경우에 따라 조합순서가 반대(예를 들면 일본어의 '내딛다'는 '딛어 내다'에 더 가까움)이기도 하다는 것. 또 우리말에서 '듣다'라는 동사를 약(藥)에도 사용하는 것처럼, 일본어 역시 소리에 쓰는 '듣다'와 약효에 쓰는 '듣다'가 (한자는 다르지만) 모두 きく[키쿠]로 발음이 같다. 이 밖에도 '해보다'의 '보다'가 시도의 의미이듯 일본어에서도 みる([미루] 보다)를 같은 의미의 보조용언으로 쓴다. 영어도 복합동사가 있고, medicine에 work를 쓰고, try를 해보다라는 뜻으로 쓰지만, 일본어는 한국어와 정확히 매칭이 되는 부분이 훨씬 많아 빠르게 학습이 가능했다.

 

반면 다소 큰 차이이자 놀라웠던 점은 일본어가 우리말보다 존댓말 체계가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말에는 '물어보다-물어보시다-여쭙다'처럼 상대의 행위를 높이는 존댓말이 있고 반대로 자신의 행위를 낮추는 겸사말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겸사말은 극소수의 고유동사만 있고, 있어도 '알리다'의 겸사말인 '아뢰다'처럼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으며, 상대방과 관계가 있는 행위일 때만 '~(해)드리다'를 쓴다. 그런데 일본어에는 '알다-아시다-[알다의 겸사말, 우리말로 대응 불가]'처럼 상대방과 관계가 없는 행위도 겸사말을 쓰는 것이 비즈니스 매너로 통용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화어'라고 하여 '식사'가 '진지'가 되는 것처럼 명사 자체를 높이거나 '예쁘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우리말로 최대한 표현해보자면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가 된다. 유학이 아니라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경어를 마스터하고 일본에 갔다면 좋았겠지만 빠듯한 스케줄로 인해 겉핥기에 만족해야 했고, 일본에 오고 나서도 경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대부분의 어학이 그렇지만 일본어도 경험상 계단식으로 성장하게 된다. 처음엔 라틴문자가 아닌 일본어의 카나가 진입장벽이지만 이후로는 우리말과 호환이 되는 문법으로 인해 빠른 기초 학습이 가능하다. 그러다가 한자의 벽에 마주치게 된다. 상용한자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면 모르는 한자도 유추가 가능해지면서 이해할 수 있는 어휘가 크게 늘어난다. 한자를 넘어서면 경어의 벽이 있고, 순일본말의 벽이 있고 하는 식이다. 매일을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며 이제 세 단계 쯤 올라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2017년 2월 말, 드디어 비자가 나왔다. 그간 틈틈히 일본으로 건너가는 데에 필요한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이제 살 집을 찾는 일만 남아 있었고, 도쿄에서 방을 구하는 일은 서울에서처럼 일주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도 큰 오산이었고, 안일한 생각에는 언제나 그렇듯 청구서가 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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