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열도일기 8화: 일본에서 비서로 살기

메구로주민2019.02.06 01:48조회 1176추천 3댓글 0

    • 글자 크기

 

생각치 못한 계기로 그룹 오너의 비서가 된 이후, 초반에는 일을 가르쳐 줄 전임자가 없어 주변 임직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업무수행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신사업담당은 결국 사업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책임이 따르는지라, 포지션은 직원이면서도 느껴지는 책임감은 직원의 것이 아니었다. 반면 비서의 경우 해야 할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되기 때문에 업무에 익숙해진 후에는 부담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불어 다양한 정보에 액세스할 수 있고, 사내외 누구나 '오너 부탁'이라는 말 한마디에 협조적으로 대해줬기 때문에 일처리도 굉장히 수월했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사실 비서의 직무만족도는 전적으로 '본인이 누구를 수행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누구'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물론 언론에 수차례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말이다.

 

photo-1546529249-8de036dd3c9a.jpg

후지산으로 유명한 시즈오카.

 

35년 전, ABC 그룹 오너는 시즈오카에서 식기를 팔던 스무 살 영업맨이었다. 약 60종류의 식기를 세트로 구성해 10만엔에 판매했다. 자주 쓰던 영업멘트는 "그릇이 좋으면 어떤 요리를 담든 맛있어 보인다"였다. 매일 차를 타고 다니며 방문판매를 했고, 점심시간에 클라이언트사의 구내식당을 빌려 여직원들 대상으로 영업을 하기도 했다. 실적은 꽤나 우수한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음운전으로 대인사고를 내고, 이로 인해 면허 취소와 함께 700만엔의 빚이 생기면서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울한 날들을 보내다가, 더 이상 방문판매가 불가능하니 매장이라도 세워야겠다 싶어 어찌어찌 점포를 냈다. 그리고는 차별화를 위해 본인이 직접 요리한 음식을 플레이팅해 그릇을 전시했다.

 

그런데 손님들 반응은 의외였다. 그릇을 사가는 게 아니라, 음식이 맛있어 보이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젊은 여성들로부터 그런 문의가 많았다. '이건 자취생 수준밖에 안 된다. 역 주변에 제대로 된 요리 교실이 많지 않냐'라고 반문하니 '재료 손질도 잘 못하는데 그런 데는 능숙한 사람들밖에 없어서 낄 수가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요리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초심자를 위한 클래스가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어차피 매장에 식기는 다 있으니 요리 교실이나 해보자며 재료비만 받고 젊은 여성들을 위한 쿠킹 클래스를 열었다. 

 

쿠킹 클래스는 입소문을 타며 빠르게 퍼졌다. 금세 사람이 모여들었고 5년 뒤인 1989년에는 직원 20명을 갖춘 번듯한 중소기업이 된다. 대박을 치게 된 건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9년, 한 쇼핑몰에 입점할 때 통유리 인테리어를 채택하면서부터였다. 쿡방이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듯이, 안에서 요리를 만드는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이게 만들어 그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했다. 여기에 다른 부동산 디벨로퍼들의 눈에도 띄게 되면서 입점 요청이 쇄도했고, 일본에서 'F1층'이라고 칭하는 20~34세 여성의 인기 취미로 부상하며 회사는 가파른 성장세를 타게 된다. 

 

9.jpg

사진처럼 외벽을 전부 쇼윈도 식으로 바꿔 주의를 끌었다.

 

 

2019년 기준 ABC는 일본 전국에 약 130개의 점포와 누적 회원 29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경험상 일본인이라면 10명 중 9명 정도는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오너는 2014년에 일본 최대의 모바일 통신사인 NTT도코모에 회사 경영권을 200억엔에 매각하고 지금은 주주로만 남아 있다. 그런 오너 밑에서 약 8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비서로 근무하며 내가 인상 깊게 느낀 점은, 크게 꼽자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격에 대한 것으로,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현장에서 본인이 손님들을 직접 상대하며 회사를 키워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의 모든 일을 웃어넘긴다. 한번은 스케줄을 뒤바꿔 입력하는 역대급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는데도 화난 기색조차 없이 태연해 오히려 무서웠던 적이 있다. 어떤 날은 중국에 진출 중인 ABC를 모방해 현지에서 카피캣 브랜드를 내놓고 강사와 고객을 빼돌리는 모 회사의 만행에 대한 보고서가 메일로 온 적이 있다. 비서인 내가 읽어도 당장 그 회사에 쳐들어가고 싶을 정도의, 누구나 격분할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너의 답장은 겨우 세줄이었고, 내용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는,

주위를 잘 살펴보면 또 다른 기회가 있습니다. 

이번 일은 웃어넘깁시다." 

 

창업을 한 지금 시점에 다시 생각해보면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경영에 대한 것으로, 사업을 성공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누가 봐도 그 사업이 아니게끔 만들고, 그걸 지조 있게 끌고가는 것'이라는 배움이다. 이를테면 '역 주변의 제대로 된 요리 교실'을 제치고 최대의 요리 교실 운영회사로 성장하는 방법은, 수강생 또래의 젊은 강사, '쿠킹 스튜디오'라는 색다른 이름, 요리를 배우는 것보다 만드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컨셉 등, 1984년을 사는 누가 봐도 요리 교실이 아니게끔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쇼윈도 디자인이 더해져 빛을 보기까지 15년이 걸렸으니, 사업이란 혁신과 인내의 합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본에서 쿠킹 클래스의 입지는 한국에서 필라테스 정도에 해당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20~30대 직장인 여성들이 퇴근 후 소비할 수 있는 주요 취미 중 하나이다. 한국은 아직 돈을 내고 요리를 배우는 문화가 대중적이지 않지만, 서서히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리라 생각한다. 마치 과거 찻집이나 다방이 스타벅스가 들어오면서 카페로 재편됐듯이, 혹은 과거 운동하는 사람들만 다니던 체육관이 짐, 필라테스, 요가 등으로 대체되고 있듯이.

 

페이스북 커버.png

이때의 배움이 월요일의 도쿄를 만드는 데에도 영감을 주었다.

 

실은 월요일의 도쿄를 만들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두었다. 누가 봐도 인재소개회사가 아니게끔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국내에서 단 하나의 에이전시도 선택하지 않았던 커뮤니티의 방식을 택했다. 이름에서 취업, HR, 워크, 일자리, 일본 등 에이전시스러운 뉘앙스의 단어도 전부 빼버렸다. 인터넷 상에 산재되어 있는 온갖 일본 취업후기도 한데 모았다. 실제 일본에 취업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어떻게 합격했는지 경험을 공유하는 이벤트도 열고 있다. 나름대로의 컨셉 혁신은 내놓았으니 이제 꾸준히 밀고 갈 때다. 단지 일본 취업을 생각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커뮤니티가 되는 데에 15년까지는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笑

 
    • 글자 크기

댓글 달기

아무말 대잔치도 환영합니다!

이전 1 ... 3 4 5 6 7... 10다음
첨부 (3)
photo-1546529249-8de036dd3c9a.jpg
186.4KB / Download 4
9.jpg
212.4KB / Download 4
페이스북 커버.png
732.2KB / Download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