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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일기 2화: 어떻게 일본이었나

메구로주민2018.11.22 01:42조회 47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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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를 못하는데도 면접을 봐주는 구나.' 서울역에서 면접 장소인 밀레니엄 힐튼으로 향하는 작은 언덕을 오르는데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면접을 보기로 한 곳은 일본 전역에서 요리교실을 운영하는 'ABC쿠킹스튜디오'(이하 ABC)라는 회사였는데, 솔직히 처음 소개를 받았을 때 나의 흥미나 적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야의 기업이라고 생각했고, 요리교실을 운영하는 회사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ABC는 일본 내 130개, 해외에 25개의 점포를 관리하며 산하에는 각각 피트니스, 물류, 보험, 결제, 캐피탈, HR 사업을 운영하는 6개의 자회사를 둔, 창업 30년차의 중견 그룹이었다. 2014년에 NTT도코모에 기업가치 4,000억 원에 인수되어 현재는 도코모의 계열사인데, 생각보다 ABC가 규모와 업력이 있고 요리교실 뿐만 아니라 여러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뭔가 여기서 일을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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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Cooking Studio 긴자점. 이 같은 점포를 일본 전역에 130개 가량 운영하고 있다.

 

잠시 한국에서 스타트업을 운영하던 내가 왜 구직을 하게 되었는지 그 맥락을 설명하고 싶다. 전역 후 1년 간 졸업을 준비하며 진로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계획과 달리 전역 직전 친구들과 함께 가격정보 스타트업인 서울프라이스를 창업하면서 휴학을 결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까지 내 삶에 이렇다할 터치가 없었던 부모님이 학업을 먼저 끝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나는 나도 성인이고 다 생각이 있노라며 핏대를 세웠지만, 언제까지고 내 졸업을 기다리며 경제적인 지원을 해줄 수는 없으니 휴학을 할 거면 이제부터 독립하라는 말에 금세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오기(傲氣)까지 백기를 든 것은 아니어서, 다시는 이런 반대에 부딪히고 싶지 않으니 얼른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언어학 부전공을 포기하고 조기졸업을 신청했다. 나름 중대한 결정을 내리며 서울프라이스에 전력을 다했지만, 아쉽게도 성과는 노력한 만큼 거두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케일업의 문제가 커졌고, 덩달아 독립에 대한 압박도 다시 커지면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고정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ABC를 소개받고 면접을 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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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열심히 운영했던 서울프라이스.

 

면접은 회사가 통역을, 그것도 일한통역, 한일통역을 한 명씩 붙여주어 다행히 말하고 싶은 바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일본 기업은 한국 기업에 비해 신입 채용시 정량평가보다는 정성평가를 중시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면접을 굉장히 중요한 평가수단으로 여긴다. 일본의 채용문화는 추후 별도의 주제로 다룰 예정이지만,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한국 기업이 지원자에 대해 정성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것을 자소서에 서술하게 한다면, 일본 기업은 면접에서 질문-답변-추가질문과 같이 대화를 통해 파악하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를 테면 나 역시도 "왜 외국에서 일을 하려고 하는지"라는 질문을 받고, '교환학생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잠깐 살았었는데 이때 알게 된 NUS Confessions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국내에 대나무숲이라는 페이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중략) 이처럼 외국에서의 경험이 시야를 넓히고 또다른 기회로 이어지기 때문에 일본에 살면서 많이 배우고 싶다'라는 취지로 대답하자, "그럼 일본에서 많이 배운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같은 식으로 추가질문이 이어졌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질문은 "잠실 롯데월드몰에 한국 ABC쿠킹스튜디오의 첫 점포를 냈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의 성과가 안 나오고 있는데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는가."인데, 준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일단 임기응변을 해야할 것 같아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는데, 말을 다 하고 나니 꽤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롯데월드몰 일대는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인데 ABC쿠킹스튜디오는 고객이 정기적으로 수업을 들으러 찾아와야 하는 요리교실이다. 대부분의 고객층이 여성임을 감안하면 여성 상주인구가 많은 곳에 점포를 내야 실적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분당이 그런 지역이므로 다음 점포는 분당에 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질문을 던진 임원은 만족한 듯 보였고, 면접이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면서 결과적으로는 ABC의 자회사인 HR회사에서 일 해보지 않겠냐는 오퍼를 받았다.

 

비자가 나오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냐고 물어보니 빠르면 한달에서 늦으면 두 달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했다. 어째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이제 일본어를 공부할 차례였다.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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