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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일기 7화: 일본에서 생긴 일

메구로주민2019.01.27 19:08조회 457추천 3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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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간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도쿄의 봄을 보내고 나니, 이제 사업을 어떻게 끌고나가야 할지 감히 잡히는 듯 했다. '신사업담당이라니, 일본도 잘 모르는데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속마음도 불안감을 걷어내고 조금씩 효능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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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방문했던 마닐라의 직업훈련시설. 과정 별로 체계적인 실무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6월 초, 한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후속 업무를 하고 있던 하루는, 내 입사면접을 담당했던 임원이자 그룹사 오너의 친동생으로부터 특이한 연락을 받았다. 오너가 출장 차 하와이에 갔다 왔는데, 급히 나를 보고자 하니 오너의 자택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의 라인 프로필을 보내주며 자세한 내용은 직접 연락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메세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하와이 출장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OOO상한테 말씀 들었습니다만 15시 30분까지 찾아뵈면 될까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어떤 건으로 저를 찾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너는 그 이전에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일부 임직원들이 참석하는 미팅에 사장님이 양해를 구하고 OJT 기간이었던 나를 동석시켰을 때였다. 당시 신입사원이라고 소개를 받아 짧게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고민 고민 끝에 고른 단어들로 메세지를 보내면서도 혹여 실수를 했을까봐 조마조마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낯익은 쉼표를 보며 한국이든 일본이든 부모님 세대의 메신저 말투는 다 똑같은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는, 도대체 무슨 부탁일까 머리 속으로 온갖 추리소설을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20평형 월세만 600만 원이 넘는다는 오모테산도의 초고급 주상복합에 도착해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러 현관이 열리자 그때부터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러 애썼다.

 

뜨거운 6월의 햇살이 조금은 텁텁한 공기를 자아내던 자택 거실에는 미니멀리스트를 연상시키는 깔끔한 직사각형의 테이블과, 하와이발 항공편의 수화물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제로 할리버튼 캐리어가 무게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 오너의 안내로 그를 마주보고 테이블에 앉았다. 물론 그의 양손은 테이블 위에, 내 양손은 무릎 위에 있었다. 당시 대화를 우리말로 재구성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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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007 가방'으로 더 유명한 제로 할리버튼. 일본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캐리어 브랜드이다.

 

 

"그래. 회사는 좀 어때?"

 

"네, 입사한 지 두달이 지났는데 이제야 적응이 좀 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다 한국에 계신가? 외국 나와 있는 걸로 걱정은 안 하시고?"

 

"그렇습니다. 입사 직전에 한번 왔다 가시기도 해서 걱정은 딱히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는 업무에는 애착이 좀 가나?"

 

"솔직히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이 좀 잡히고 자신감도 생겨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건... 내 비서를 해줬으면 해."

 

순간, 일에 대한 애착을 물어본 의도가 그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말은 이랬다. 오너는 최근 3년을 홍콩에서 살다가 지난해 말에 일본에 돌아왔는데, 당시에는 비서를 안 썼지만 일본에 돌아와보니 처리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비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은 몇몇 임직원들에게 그때 그때 부탁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전속 비서를 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젊고,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자리를 옮겨도 큰 공백이 없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친동생이 나를 추천해줘서 자세히 얘기를 해보고 싶어 불렀다는 것. 달리 말하면 면접인 셈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얘기를 더 나눴다. 아마 오너는 내가 비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지금 맡은 HR 관련 업무는 비서 신분으로도 계속할 수 있으니, 다음주까지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고 다다음주부터는 본인 사무실로 출근하는 게 어떻겠냐는, 사실상 지시에 가까운 권유를 받았다. 자회사 사장님에게는 자기가 잘 말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운전도 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일본 면허는 있는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는 운전해본 적이 없다고 하니(일본에서 한국 면허증은 일본 면허증으로 교환이 가능하다), 본인 차는 운전석이 왼쪽이니 오히려 다행이라며 잘 됐다고 했다. 예감이 영 좋지 않았지만 눈치껏 맞장구를 쳤다.

 

고작 두 달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벌려놓은 일들이 떠오르며 어떻게 수습을 해야될 지 눈앞이 캄캄했다. 어쨌든 그렇게 하루 아침에 중견그룹 오너의 비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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